의정부시 가능3동 산 82번지는 선조의 여섯째 딸 정휘옹주와 그 남편 전창군 유정량의 묘가 있었는데 197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로 이장됐다. 유정량은 영의정 유영경의 손자로 14세에 정휘옹주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고 전창위에 봉해졌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무인 다운데가 있어 말타기를 즐겨했으며 장군이 되기를 원했으나 부마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에 오를 수 없음을 불만스럽게 여긴 나머지 옹주에게 퉁명스럽게 대할때가 여러번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무렵 우리나라에 담배가 처음 들어와 남녀 구분 없이 장죽으로 담배 피우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자 옹주도 장죽을 물고 다녀 남편이 보기에 지나치고 눈에 거슬려 몹시 나무랐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부부싸움까지 번졌다. 화가 난 옹주는 대궐로 들어가 분함을 실토하자 선조께서 부마를 불러들였다. 유정량은 괴나리 봇짐을 메고 짚신 두 죽을 양허리에 찬 채 궁중으로 들어갔다. 그 차림새가 버릇없는 것 같으면서도 기인다운 데가 있어 선조께서 손 행색으로 궁중에 들어선 까닭을 물으셨다. 그러자 유정량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상감의 노여움을 산 죄인
이국진 신흥대학 외래교수 개봉 열흘 만에 관객 수 200만을 돌파한 영화 ‘마더’에서 주인공 도준은 어렸을 때 엄마가 살기 힘들어 동반자살을 위해 아들에게 먹인 약으로 인해 바보가 된다. 그런 도준은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면 혼내주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누군가에게 바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사적으로 공격을 한다. 어느날 도준이 뒤쫒아간 여학생에게서 바보라는 소리를 듣자 반사적으로 그녀를 죽이고 수감된다. 엄마는 그런 아들을 구하기위해 범인을 찾아나선다는 줄거리다. 이 영화 속에서는 ‘바보’라는 주제가 복선이 되어 영화감상의 묘미를 살리고 있다. 관객들의 해석과 의견이 다양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긴 여운을 남게 한다. 최근 일련의 ‘바보’라는 주제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고 노무현대통령을 지칭한 ‘바보 노무현’이라는 닉네임은 고인이 살아생전 어떤 사람이었는가 압축해 표현한 말로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정과 안타까움이 녹아있는 애칭이 아닐 수 없다. ‘바보’ 라는 말 속에는 고인이 태생부터 철저한 비주류로서 외롭고 올곧게 투쟁한 정치적 철학과, 지극히 인간적이고 소
한의학박사 / 한방내과전문의김재우한의원 김재우 원장 예년보다 빠르게 무더위가 찾아오고, 남부지방에서는 장마가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여름에 접어든 것이다. 녹음이 우거지고 시원한 바다가 생각나는 여름이 싫지는 않지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만큼 이에 맞게 건강을 신경써야 할 부분이 있다. 여름에는 기온과 습도가 함께 높아져 음식물이 부패하기 쉬우며, 식중독 발생률도 높아진다. 포도상구균, 비브리오균, 대장균, 살모넬라균 등이 식중독을 일으키는데 이 중 포도상구균이나 보툴리누스균이 분비하는 독소는 끓는물에 장시간 끓여도 죽지 않는다. 또한 비브리오균은 치사율이 매우 높으므로 여름철에 어패류를 섭취할 때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대부분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균이 발생하기 때문에 항상 청결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하겠다. 식중독을 예방하는 식품으로는 매실이 있다. 매실은 대장균, 포도상구균, 장염비브리오, 콜레라균에 대해 강력한 살균력이 있으며, 많이 섭취하거나 장기간 섭취해도 인체에 해가 전혀없음이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따라서 여름철에는 매실 엑기스를 이용하여 시원하게 차로 만들어 마시면 식중독
화창군은 인성군의 셋째로 해원군의 아들이니 선조의 증손이 된다. 인조 18년 (1640)에 출생하여 47세의 일기를 마쳤다. 현재 분묘가 많이 훼손되어 있고 특히, 묘역을 보호하는 담장은 완전히 파손되었다. 그러나 묘비는 잘 보존되어 있는 상태로 ‘유명조선왕증손화창군 위윤지묘 군부인화산노씨 부좌’라는 삼행의 음각명이 뚜렷하다. 뒷면에는 ‘숭정기원후재무년시월일립’이라 하였으니 1738년이 된다. 화창군이 하세하고 난 뒤 50여년후 건립한 것으로 추측된다. 장방형의 대석에는 측면에 연주문 기둥이 우주 대신 음각 되었고, 중간에도 3주가 모각되어 있다. 또한 상면의 비좌에는 복련이 조식 되었는데 판내에 고사리문 등의 장식이 있다. 이들 문양은 연대가 뚜렷하여 조선시대 조각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 비명중에 ‘양주동탑곡(楊州東塔谷)’이라 하였으니 260여년간 이곳의 지명임을 알 수 있다.